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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Review

[영화] 박열 - 나는 승리자다

한우물만파 2022. 7. 1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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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별한 동거

일본 도쿄의 허름한 2층 주택에 세 들어 사는 남녀는 동거 중이다. 이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았았고 여자는 남자의 조금 특별한 점에 한눈에 반하게 된다. 그 특별함은 바로 남자가 직접 쓴 시였다. 권력과 지위 모든 것이 상관없이 당한 만큼 갚아준다는 내용의 시는 당시 일제강점기를 살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일본 너희가 아무리 우리를 억압하고 핍박해도 우린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엄청난 저항정신이 담긴 것이었다. 바로 이 시를 지은 사람이 영화 주인공인 박열, 이 시에 반한 여자는 박열을 사랑하는 후미코이다.

 

2. 과감한 행동파, 이것이 박열의 스타일이다.

후미코는 이런 박열을 돕기 위해 박문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짓고 박열과 함께 항일 투쟁에 동참한다. 바로 폭탄테러이다. 때마침 경성과 도쿄에서 폭탄테러를 계획 중인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이었다. 박열은 이 의열단을 통해 일본으로 폭탄 반입을 시도하지만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망에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실패 속에 박열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강력한 투장을 실행한다. 친일파에게 단호한 경고장을 보내고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직접 집으로 찾아가 격렬한 응징을 했고 여러 차례 폭행죄로 체포된다. 이런 박열의 모습에 후미코는 만일 조선에 박열과 같은 열렬한 투사가 30명만 있다면 조선독립은 물론 세계 제패도 할 수 있을 것이라 평가했다. 이렇게 후미코와 박열은 서로에게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의 인생을 한 번에 뒤집어 놓을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3. 관동대지진 

단 10여 분 만에 사망자 10만 명이 발생했고 계속되는 여진으로 도심은 불바다가 되었다. 패닉 상태가 되어버린 일본 사람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상하게도 이 사람들 손에는 모두 몽둥이, 칼 , 죽창 등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피해와 참상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정부는 잘못된 정보를 일본 사람들에게 퍼트렸고 이에 희생된 조선인들은 기록에만 6,661명에 이르렀다. 대지진이 일어난 상황에서 일본 정부 주도하에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약탈 등 범죄를 저질렀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조선인 대학살이 일어남에도 방관으로 일관했다. 또한 폭동 혐의를 뒤집 어쓰 울 대상으로 독립운동가를 지목하고 관동대지진 2일째 박열과 후미코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다. 죄목은 이 대지진의 혼란 속에 일본 왕세자를 폭탄을 던져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유 었다. 일본 입장에서 왕세자 암살 시도는 대역죄임으로 최소 사형에 처하는 중죄였으며 단 한 번의 재판으로 형량이 결정된다. 이 죄를 박열과 후미코에게 뒤집어 씌우고 독립운동가의 위상을 떨어트리려 한 것이다. 박열과 후미코는 아니라고 부인해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고 어차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면 일본의 온 관심이 집중된 이 재판을 저항의 장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조선을 강탈은 일본제국의 파렴치한 민낯을 이 재판에서 낱낱이 까발려 주겠다는 의도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기소가 되고 목숨을 건 단 한 번의 재판이 시작된다.

 

4. 목숨을 건 단 한 번의 재판

단 한 번의 재판을 앞둔 박열과 후미코에게 두 사람의 변호를 맡은 후세 다츠지라는 변호사가 찾아온다. 후세 다츠지는 조선사람들이 '우리 변호사'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세 사람은 재판을 준비하고 싸움을 시작한다. 박열은 재판을 앞두고 판사에게 4가지 요구조건을 얘기한다. "첫째, 법정에서 조선의 예복을 입겠다." 이는 재판관이 일본의 왕을 대표하니 박열 본인은 조선의 대표로 법정에 서겠다는 의미였다. "둘째, 나는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강도행위를 규탄하기 위해 법정에 서는 것이므로 나의 이런 취지를 선언케 할 것." "셋째, 나는 조선말을 쓰겠으니 통역관을 세울 것." "넷째, 재판관과 나 둘 다 양국의 대표이므로 내가 앉을자리를 재판관의 앉을자리와 같게 할 것." 이렇게 박열은 본인의 의도를 투명하게 드러내며 재판의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일본은 미개한 식진지 조선인들과는 다르다, 일본은 조선이 인라 하여 함부로 다루지 않고 아주 합법적이고 민주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조건을 수용한다. 일본 역사상 유례없고 세계사에서 전무 후부 한 재판이 시작된다. 조선독립운동가의 상장인 흰색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후미코와 조선의 전통예복을 입은 박열이 법정에 들어서자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렇게 재판이 시작된다. 박열과 후미코는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기세로 재판을 압도한다. 마지막 선고공판에서 판사가 반성이나 뉘우침이 없느냐 물었고 박열은 그 말은 자신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며 진정으로 반성해야 할 사람은 당신들이라 외치며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 재판부는 박열과 후미코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런데 재판 후 두 사람을 무지 징역으로 형량을 낮춘다는 통보가 날아온다. 그 의도에는 일본 왕실의 은덕과 일본 정부의 자비를 과시하며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박열은 통보서를 바로 찢어 버렸지만 일본 신문에서는 박열과 후미코가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며 거짓 기사를 발행한다.

 

5. 1945년 8월 15일 독립 해방의 날

4개월 후 후미코가 독방에서 유서한장 남기지 않고 자살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한다. 이에 일본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독립운동가들도 석방되었지만 박열은 석방되지 않았고 동포들의 탄원이 빗발쳤다. 이에 일본은 2달 후 조용히 박열을 석방시켰고 수만은 동포들의 뜨거운 환영 속에 다시 고곡의 품으로 박열은 돌아온다. 1989년 박열은 건국훈장에 추서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일본인이 단 2명이 존재하는데 그 2명이 바로 후미코와 후세 다츠지다. 후미코는 생전 동료들에게 죽으면 꼭 조선땅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그녀는 박열의 고향 경상북도 문경에 안치되어 있다. 또한 1953년에 사망한 후세 다츠지는 "나는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형제들에게 사죄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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