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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은 1950년 발발한 '6.25 전쟁'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현대사입니다. 먼 옛날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직접 몸으로 겪으셨던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1. 동족상잔의 비극 6.25
광복 직전에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 북부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련은 일본 군의 무장해제 그리고 우리나라의 치안유지를 명분 삼아 한반도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광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광복과 동시에 북쪽은 소령 군이 장악하게 됩니다. 미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군도 한 달 뒤인 9월에 남한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는 약 3년간의 미소 군정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복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 15일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게 되고, 같은 해 9월 9일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1950년 6월이 됩니다. 그런데 그전부터 38도선 근처에서 서로 양측 간의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북한의 평화 제스처에 우리가 순간 방심하고 비상경계령을 푼 것이 1950년 6월 24일입니다. 전군의 약 1/3의 병력이 외박 혹은 휴가를 나가 있는 틈에서 북한군이 선제공격, 기습한 것입니다. 38도선 전역에서 그들이 밀고 내려왔고 우리는 탱크가 단 한 대도 없었는데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 T-34를 몰고 수백 문의 자포와 함께 밀고 내려오면서 우리를 유린해갔습니다. 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게 되었고,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라인 안에 갇혀서 우리 자유진영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UN 안보리를 개최를 하고, UN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1950년 9월에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한 미국을 위시한 16개국 UN연합군이 우리를 도우러 부산으로 옵니다. 전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맥아더는 판단하였고, 밀고 올라가면 좋겠지만 아군의 피해가 클 것 같아 북한군의 허를 찌르기고 했습니다. 서해안을 돌아서 인천으로 상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고베, 요코하마, 그리고 부산에서 동시에 군함이 출발해 제주도 남부에서 집결합니다. 9월 15일 상륙하게 됩니다. 이 기적의 상륙작전은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 북한군의 경우는 보급로를 끊길 위험에 처했으며 심리적인 충격이 엄청났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이 밀고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서울을 1950년 9월 28일 다시 수복하게 됩니다.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게 되고, 10월 19일 평양을 우리가 차지하고 압록강 두만강 라인까지 우리는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문제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국 공산당이라고 중공군이라고 불렀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코앞까지 UN군이 밀고 들어오니까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전투 병력을 파견하였습니다. 얼마나 군인 숫자가 많았느냐면, 속설이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을 주고 나머지 두 명한테는 피리와 꽹과리를 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낮에는 제공권을 장악해서 UN군들이 조준 폭격을 하니까 땅굴을 파서 그 안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때 중공군이 판 땅굴이 6,7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의 길이와 같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땅굴을 많이 팠습니다. 밤이 되면 피리를 불면서 전진을 하게 됩니다.
2. 6.25 전쟁과 흥남철수
당시 UN군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영하 30도에 달하는 개마고원의 추위와 밤마다 30만 명이 불어대는 피리 소리에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속절없이 우리는 다시 후퇴하게 됩니다. 이때 적의 포탄이나 파편에 맞아 죽은 병사보다는 추위에 온몽이 동상으로 썩어가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되니 이것이 가슴 아픈 1.4 후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었습니다. 중공군들한테 퇴로를 차단당한 미국의 10군단 경우에는 흥남부두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배로 탈출을 시켜야 되다 보니 미군 10만 명이 군수물자 35만 톤을 가지고 여기서 탈출하려는 엄청나게 큰 작전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흥남철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군들한테는 눈앞에 놀라운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문제는 피난민 10만 명이 몰려든 것입니다. UN군한테 끝까지 협조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북한군이 우리 마을을 점령하게 되면 모두 학살당할 상황이었습니다. 미군은 고민했고 이때 민간인을 실은 마지막 배가 '메더 리스 빅토리호'라는 배입니다. 정원이 60명밖에 안 되는 화물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 10 군당장의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께서 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호소하게 되고 결국 25만 톤의 군수품을 버리고 그보다 몇 배 더 중요한 몇백 배 몇천 배 더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승선인원 60명인데 14,000명이 타게 되었습니다. 여기 있는 부두와 공장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 지역은 폭파해 버립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일간의 향해를 하며 부산을 거쳐 거제도로 오게 됩니다. 누울 수도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는 비좁은 배 안에서 새 생명이 5명이나 태어납니다. 이 아기들의 이름을 당시 미군들은 김치 1호~5호 이렇게 붙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14,000명 중에 사망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이 오히려 인원이 5명 늘었습니다. 이것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성공한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다시 전쟁 이야기로 돌아가 1.4 후퇴로 태안반도 근처까지 밀렸던 우리 국군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서 밀고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38도선 근처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1951년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3. 기나긴 휴전의 과정과 청춘들의 피
당시 소련군은 두만강 근처에서 공중지원 정도를 해주고 있었는데 38도선 근처에서 길게 이어지는 전투에 힘이 부친 중국이 이런 소련에게 전쟁 참여를 요청했다. 하지만 소련은 만약 자신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 같아 중재에 나서게 되고 휴전을 처음 제의하게 됩니다. 이때 양쪽 진영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양쪽의 피해가 덜했을 텐데 휴전제의 후 2년 동안 전쟁은 계속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휴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포로들은 어떤 방식으로 소환해야 할 지에 대한 그 방법을 양측에서 합의를 못 본 것 있었습니다. 결국 긴 협의와 싸움 끝에 2년 뒤인 1953년에 휴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4. 아빠, 엄마의 청춘과 가족
6.25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우리는 원조경제라고 불리는 시대를 맞이한다. 이 50년대에는 미국에서 밀가루, 설탕, 면, 재봉틀에 실, 고무, 타이어까지 모든 생필품을 우리는 원조받고 근근이 살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미국의 원조는 50년대 후반에 끊기게 되고 60년대를 맞이한 우리나라는 스스로 경제를 일으켜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정부는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값싼 노동력이 많으니 뭔가를 만들어 수출하거나 수출 주도형 산업을 육성하려고 했으나 그 기반을 다질 돈이 부족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에 기회가 생겼는데 그 첫 번째가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들의 삶이었던 파독, 간호사 광부였습니다. 당시 독일의 경우 간호사와 광부는 3D업종으로 인력 부족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외환수급의 목적으로 일자리가 필요했던 우리와 해외인력수급이 절실했던 독일의 경제협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각자의 꿈을 가지고 독일로 떠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의 생활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광부들은 1000m 아래의 갱도로 내려가 들게 됩니다.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일어납니다.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번 이들은 고국으로 돈을 송금해 보냅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 송금한 돈이 1년에 1200달러였고 이 돈은 당시 우리나라 GDP의 2% 애 달할 정도였습니다. 이 돈이 한강의 기적을 만든 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런 기반으로 우리는 드디어 1970년대 북한보다 국민소득이 앞서는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경제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지만 잃어버린 가족을 만나지 못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에 있는 가족은 만날 길이 없으니 우선 남쪽에 있는 이산가족만이라는 취지로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기획 프로그램을 만들게 됩니다. 이산가족의 뜨거운 성원으로 방송은 새벽까지 이어지고 이후 KBS는 138일 동안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진행하고 약 10,080여 가족이 상봉하게 됩니다. 이에 세계가 주목하고 모든 언론이 앞다투어서 대한민국의 감동과 아픔을 보도했고 온세계가 함께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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