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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 작전명 Operation Chromite 이것은 6.25 전쟁 당시에 열세에 몰려있던 우리가 전세를 역전시켰던 가장 대표적이고도 위대한 사건입니다. 상륙작전에 얽힌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들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1. 북한군의 기습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T-34 탱크로 무장한 김일성 부대는 38도 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강행하게 됩니다. 단 4일 만에 우리의 수도인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당했고, 한 달 만에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전 지역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이것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16개국 군인들로 구성된 유엔군을 이끌고 부산항으로 입하하게 됩니다. 당시 유엔군의 총사령관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맥아더 장군이었습니다. 

 

2. 신의 한 수가 된 맥아더 장군의 전략과 그의 집념

맥아더 장군은 전면전을 펼칠 경우에 적의 주력부대가 너무 강하다 보니 아군에게 피해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서 은밀하게 인천으로 상륙하는 바로'인천 상륙작전'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맥아더 장군은 인천으로 상륙하려 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지리적으로 서울하고 34Km밖에 되지 않아 서울 하고 가깝습니다. 바로 서울을 수복하면 수도를 회복할 수 있어서 적의 주력부대에게 심리적 타격감을 주게 됩니다. 두 번째는 모든 길은 바로 서울로 연결되게 됩니다. 이 도로를 차단해 버리면 이들의 보급로를 끊어 버리니까 식량과 탄약 공급이 안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미 해군에서는 반대 의견을 냅니다. 그 이유는 인천으로 들어가는 수로가 너무 좁았습니다. 당시 유엔군의 함정이 261척에 7만 명을 태우고 있었는데 수로가 좁으면 신속하게 그 군함들이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북한군이 물에 떠 있는 지뢰, 즉 기뢰라도 뛰워 놓으면 이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엄청나게 큰 조수간만의 차이였습니다.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밀물 때 신속하게 상륙을 해야 되는데 그 밀물이 차 있는 시간이 2시간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때 북한군이 격렬하게 저항을 하면 상륙할 수 없고, 점점 물이 빠져 약 4km나 되는 엄청난 갯벌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데 질퍽질퍽한 땅에 군인들이 물자를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성공 확률을 5,000 분의 1이었습니다. 정말 황당한 숫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고집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확률이 5,000분의 1밖에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적이 가장 방심하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뚝심으로 밀어붙이게 됩니다. 날짜까지 정하게 되는데 밀물이 가장 많이 들어와서 인천 항구에 수심이 가장 깊을 때의 날짜를 계산하여 9월 15일, 10월 11일 그리고 11월 3일 단 3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0월이나 11월로 가면 아무래도 지금 전략적으로도 다급하고 겨울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기후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9월 15일 은밀하게 진행하는 야심한 시간 밤 12시로 정하게 됩니다. 상륙작전 성공 시간은 단 2시간뿐이었습니다. 

 

3.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피 흘린 소년병

그렇다면 이 작전을 어떻게 성공시켜야 될까요? 맥아더 장군은 두 가지 미션을 던지게 됩니다. 첫 번째는 성동격서라고 손자병법에 나오는 내용인데 동쪽에서 소리를 쳐서 적군의 시선을 쏠리게 한 다음에 적의 허점이 되는 서쪽을 침략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당시 맥아더 장군은 마치 상륙할 것처럼 거짓 무전을 적에게 흘리게 되는데  평양 서쪽 남포로 상륙을 한다거나 혹은 해주, 전라도 군산, 원산, 주문진, 울진 등 정신없게 만들었습니다. 어디로 상륙할지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폭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예 병력을 상륙시키기까지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장사상륙작전'입니다. 적의 시선을 끌기 위한 페이크 상륙이었는데 772명의 중고등학생들이 뽑혀 총을 쏘는 훈련도 약 보름밖에 받지 못한 10대 소년들이 차출돼서 문산호를 타고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 상륙을 하게 됩니다. 하필이면 이때 태풍을 만나서 배는 좌초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10대 소년들은 육지로 헤엄쳐 갑니다. 식량과 총알은 단 3일뿐이었고, 그들은 용감하게 폭풍우를 헤치면서 나아가게 됩니다. 당시 포항과 영천 방면을 잇는 국도를 점거하고, 적의 북상을 저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북한군의 시선은 전부 다 동쪽으로 쏠리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구조선이 출발했지만 우리 소년병들은 그곳에서 교전을 하다가 대부분 전사하게 됩니다. 

 

4. 영화의 모티브가 된 X-RAY 작전

두 번째 맥아더 장군의 미션은 바로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X-RAY작전'입니다. 이 작전은 상륙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첩보부대를 구성합니다. 이때 구성된 첩보부대가 해군 첩보부대가 되겠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이정재 씨가 맡은 장학수 대위가 해군 첩보부대의 리더로 출연하게 됩니다. 이 해군 첩보부대는 은밀히 인천 지역으로 잠입을 합니다. 지역 주민의 도움을 받아서 적의 해안포의 위치, 병력 규모, 그리고 수로에 배치되어 있는 기뢰의 위치와 제거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을 하게 됩니다. 이때 또 하나의 부대 '켈로 부대'라는 특수부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천 앞바다에 있는 팔미도 섬으로 상륙을 해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등대를 점령하게 되고, 상륙 당시 불빛을 켬으로써 맥아더 장군의 함대를 인천으로 부르게 됩니다. 당스 그들이 켰던 불빛은 전쟁 승리의 불빛이었고, 미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전은 성공하였고, 서울을 9월 28일 수복을 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습니다. 북한군의 주력부대는 오합지졸이 되었고, 우리 국군은 북진을 해서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 지점까지 밀고 올라가게 된 것이 인천 상륙작전의 결과입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맥아더 장군, 유엔군이라고 답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승리를 역사에 기록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이름 모를 학생들, 그리고 지역주민, 우리 국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켜 준 바로 그 당시의 우리 선배님들에게 이 영화를 통해서 다시 한번 추모의 마음을 가지게 된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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