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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당시 일제 강점기와 독립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는 총 35년이며 1910년도, 1920년대, 1930년 3단계로 나눠지게 됩니다.
1. 1910년대 무력 통치 시대
초반 1910년대는 무력으로 처단하는 시대라고 해서 '무단통치시대'라 부르며 군인 경찰 즉 헌병경찰이 칼을 차고 우리 백성들을 마치 노예처럼 억압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바로 1919년 일본 집권 10년 차에 3·1 만세 시위가 벌어지게 됩니다. 종로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게 되고, 만주, 연해주, 미주 심지어는 적의 심장부인 일본에까지 만세 물결이 번져가게 됩니다. 우리의 독립의지가 세계만방에 알려지는 순간이었고, 일본은 더 이상 강압적인 통치를 할 수 없게 됩니다.
2. 1920년대 문화통치 시대에서 1930년대
'문화통치', 제목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부드럽게 다스리는 척하면서 우리 백성들을 친일파로 회유하려는 무시무시한 기만 정책이었습니다. 그런데 '3·1 운동'의 자신감을 가졌겠다 거기다 표면적으로는 부드러워졌겠다, 그래서 국내에는 각종 경제적·사회적 민족운동이 그리고 국외에서는 '무장투쟁운동'이 꽃피웠던 시기가 1920년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19년을 노력했지만 독립의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중에 가장 힘들었던 암흑의 시대가 바로 1930년대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1920년대에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군사력은 점점 더 강성해져서 중국을 침공하고 만주를 점령하여 만주국을 수립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희망이 보일 때 더 노력을 하는 법인데,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가 193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뜻을 꺾지 않고, 꿈을 잃지 않고 우리의 독립군들은 목숨을 걸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 1933년을 배경으로 영화 <암살>은 시작이 됩니다.
3. 실제로 존재했던 독립군과 독립단체
먼저 1910년대 기득권 세력이 나라를 일본에 팔았습니다. 을사오적, 이완용/이지용/이근택/박제순/권중현 등 이 을사 5적과 함께 많은 기득권 세력들이 우리 민족의 주권과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맞바꾸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진 않았습니다. 당시 부자로 이름 나 있었던 이회영, 이시영 등 6형제는 가산을 전부 정리합니다. 지금 돈으로 600억 정도 된다고 하며 이 돈을 가지고 식솔을 이끌고 바람 부는 만주 벌판 '서간도'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세운 것이 바로 '신흥강습소', '신흥 무관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독립군 강성지 '신흥 무관학교'는 산자락을 휘어 감습니다. 18개의 교실이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 아래의 평지에는 연방장이 있었고, 오전에는 역사, 지리, 산술, 화학 등 12개의 일반과목 배우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받게 됩니다. 왜 이론과 군사훈련을 병행했을까? 신흥 무관학교의 목표는 눈앞에 있는 독립의 쟁취뿐만 아니라 독립 이후에 신국가를 건설했을 때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양성에도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론과 군사교육을 병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약 3,500여 명의 훌륭한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청산리 대첩에도 참여를 하고 의열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한국독립군 등 수많은 전투와 단체에서 활약을 하게 되니 '우리나라 독립군의 뿌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속사포'도 바로 이 학교 출신입니다. 1920년대는 가장 빛나는 전투가 있었다고 하면 바로 독립전쟁 '청산리 대첩'일 것입니다. 청산리에 매복해 있던 우리 독립군이 3,000여 명의 일본군들을 처단했던 엄청나게 큰 승리입니다. 그러나 아픔도 동반이 됩니다. '당시 독립 군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었다'라는 명목으로 간도에 사는 우리 백성들을 무차별 살상했으니 이것을 '간도 참변', 경신년에 벌어졌다고 해서 '경신참변'이라고 합니다. 당시 북미의 미국, 캐나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당시 독립신문의 기록에 따르면 약 3,700여 명의 죄 없는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반격을 하기 위하여 의로운 일을 맹렬히 추진하는 단체가 만들어집니다. 바로 '3·1 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입니다. 의열단은 국내의 박재혁, 나석주, 최수봉, 김익상 등 수많은 독립 전사들을 파견해서 적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동양척식 주식회사, 부산경찰서에까지 모두 폭탄을 터트리게 됩니다. 총격전을 벌이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의거 단체를 만들었으니 '한인애국단'이라는 의거 단체를 훗날 만들게 됩니다. 대표적인 의사로서 윤봉길 선생님이 계십니다. 윤봉길 선생님은 상하이의 홍기우 공원에 모여 있는 적 장성들, 장군들에게 수통 폭탄을 던져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신 분입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100만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한 명이 했구나, 내가 앞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마'라며 지원을 받게 되는 쾌거를 이룬 것이 바로 윤봉길 의사입니다. 영화를 보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왕을 대신해서 일본 항복 조인식 때 일본 외상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서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시게미스 미모루라는 자인데 그의 다리가 불편해진 것이 바로 윤봉길 의사의 투탄 의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같은 시기 만주에서도 활약했던 부대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독립군'입니다. 사령관은 지청전이라고 불리는 장군이었으며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안옥윤'이 바로 여기 있는 한국독립군의 저격수 출신입니다.
4. 최동훈 감독은 수많은 무장투쟁 중에서 '암살'에 초점을 맞췄을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열세였던 우리에게 개인이 은밀히 적진에 침투해서 적장을 처단하는 '암살'작전이 가장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작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맞바꿔야 했던 굉장히 위험한 작전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수많은 고뇌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5.1945년 8월 15일 빛과 그리고 슬픔
이런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빛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광복 다음 달에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대국들 이념의 잣대 아래 남북이 분단되게 됩니다. 사회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던 독립군들은 '북한의 인민군'으로, 그리고 자유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던 독립군들은 '남한의 국군'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광복 5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국의 전개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포화 속에서 그들은 산화하게 됩니다. 독립군들은 우리 기억 속에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잊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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